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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보드게임의 역사, 카탄에서 윙스팬까지

1995년 카탄 이후 독일식 보드게임(유로게임)이 세계로 퍼진 과정과 슈필 데스 야레스 상, 유로게임과 아메리트래시, 크라우드펀딩, 디지털 보드게임까지 현대 보드게임의 흐름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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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이라고 하면 예전에는 주사위를 굴려 말을 옮기는 부루마블이나 모노폴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30년 사이 보드게임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운보다 계획이 중요하고, 한 사람이 일찍 탈락하지 않으며, 한두 시간 안에 끝나는 게임들이 전 세계 거실과 보드게임 카페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런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살펴봅니다. 독일에서 자란 '유로게임'이 1995년 카탄을 계기로 세계로 퍼진 과정, 그 흐름을 이끈 슈필 데스 야레스 상, 협력 게임과 레거시 게임 같은 새로운 형식, 그리고 크라우드펀딩과 디지털 플랫폼이 보드게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차례로 정리합니다.

유로게임이란 무엇인가

유로게임(Eurogame)은 독일식 보드게임(German-style board game)이라고도 불리는 보드게임의 한 갈래입니다. 영어권에서 독일 게임이 많이 들어오면서 붙은 이름이고, 유럽에서는 그냥 '보드게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로게임에는 보통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 간접적인 상호작용: 상대의 말을 직접 공격하기보다, 같은 자원이나 자리를 두고 경쟁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 탈락 없음: 게임 도중에 한 사람이 먼저 빠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끝까지 참여하도록 설계합니다.
  • 여러 가지 승리 경로: 점수를 얻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서, 같은 게임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전략을 씁니다.
  • 운의 비중이 낮음: 주사위나 카드 뽑기가 있더라도 결과를 좌우하는 정도가 작고, 계획과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 정해진 종료 조건: 점수, 라운드 수, 자원 고갈 등으로 게임 시간이 일정하게 끝납니다. 한 판은 대개 30분에서 두어 시간 사이입니다.

체스나 바둑보다는 주제(무역, 농사, 건축 등)가 뚜렷하고, 전쟁 게임보다는 규칙이 단순한 편입니다.

뿌리: 독일의 가족 게임 문화와 슈필 데스 야레스

유로게임이 독일에서 자란 데에는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전쟁을 미화하는 물건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움직여 상대를 정복하는 게임보다, 경제와 자원 관리를 다루는 평화로운 게임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독일에서는 가족이 함께 즐기는 보드게임을 만드는 흐름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국 게임보다 플레이 시간이 짧고, 일찍 탈락하는 사람이 없도록 규칙을 다듬은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1983년에는 독일 에센에서 국제 보드게임 박람회 '슈필(Spiel)', 흔히 에센 슈필이라고 부르는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디지털이 아닌 게임 박람회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행사로, 해마다 새 유로게임이 가장 많이 공개되는 곳입니다. 2024년에는 약 20만 4천 명이 방문했습니다.

독일 보드게임의 품질을 끌어올린 요인으로 자주 꼽히는 것이 슈필 데스 야레스(Spiel des Jahres, 올해의 게임) 상입니다. 1978년에 만들어졌고,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의 독일어권 보드게임 평론가들로 이루어진 심사단이 지난 1년 동안 독일에서 나온 게임을 심사합니다.

이 상은 처음부터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전쟁 게임, 롤플레잉 게임, 수집형 카드 게임처럼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마니아 위주인 게임은 대상이 아닙니다. 심사 기준으로는 게임 콘셉트의 독창성, 규칙의 명확함, 상자·보드·규칙서의 구성, 구성품의 완성도가 제시됩니다.

첫 수상작은 1979년 영국 디자이너 데이비드 팔레트(David Parlett)의 토끼와 거북이(Hare and Tortoise)였습니다. 이후 상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습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상의 후보에 오르면 보통 수천 부 수준이던 판매량이 1만 부 안팎으로 늘고, 수상작은 50만 부까지 팔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의 구성도 바뀌었습니다. 어린이 게임을 위한 별도 부문이 생겼고, 복잡한 게임에는 특별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2008년 아그리콜라(Agricola)가 받은 특별상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이를 정식 부문으로 만든 케너슈필 데스 야레스(Kennerspiel des Jahres, 숙련자를 위한 올해의 게임)가 생겼습니다. 가족용 대상과 숙련자용 상이 나뉘면서, 가벼운 게임과 깊이 있는 게임이 각자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5년, 카탄이 문을 열다

현대 보드게임 역사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해가 1995년입니다. 이 해 독일 코스모스(Kosmos) 출판사가 클라우스 토이버(Klaus Teuber)가 디자인한 카탄의 개척자(Die Siedler von Catan), 지금 이름으로 카탄(Catan)을 내놓았습니다.

카탄은 육각형 타일로 섬을 만들고, 주사위 결과에 따라 각 지역에서 나무·벽돌·양·밀·광석 같은 자원을 얻어 마을과 도로를 짓는 게임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플레이어끼리의 교환입니다. 내게 필요한 자원을 상대와 흥정해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차례가 아닐 때도 계속 대화에 참여하게 됩니다. 주사위라는 운 요소가 있지만, 어느 자리에 마을을 지을지와 누구와 어떻게 거래할지는 플레이어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카탄은 1995년 슈필 데스 야레스를 받았고, 더 복잡한 게임을 평가하는 독일 게임상(Deutscher Spielepreis)도 함께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유로게임이 유럽 밖에서 크게 성공한 첫 사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카탄이 최초의 유로게임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의 어떤 게임보다 널리 퍼졌고 이 장르 전체에 관심과 투자를 끌어들였습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2020년 기준 40개 언어로 3,200만 세트 이상이 팔렸습니다.

2000년대: 유로게임의 황금기

카탄의 성공 뒤로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게임들이 잇따라 나왔습니다. 주요 게임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게임출시디자이너처음 낸 출판사주요 수상
카탄1995클라우스 토이버코스모스1995 슈필 데스 야레스
카르카손2000클라우스-위르겐 브레데한스 임 글뤽2001 슈필 데스 야레스
푸에르토리코2002안드레아스 자이파르트알레아독일 게임상
티켓 투 라이드2004앨런 R. 문데이즈 오브 원더2004 슈필 데스 야레스
아그리콜라2007우베 로젠베르크룩아웃 게임즈2008 슈필 데스 야레스 특별상
도미니언2008도널드 X. 바카리노리오 그란데 게임즈2009 슈필 데스 야레스
팬데믹2008매트 리콕Z-맨 게임즈2009 슈필 데스 야레스 후보
윙스팬2019엘리자베스 하그레이브스톤마이어 게임즈2019 케너슈필 데스 야레스

카르카손(Carcassonne)은 프랑스 중세 도시의 이름을 딴 타일 놓기 게임입니다. 차례마다 타일 한 장을 뽑아 이어 붙이며 도시·길·수도원을 만들고, 거기에 일꾼(미플)을 놓아 점수를 얻습니다.

티켓 투 라이드(Ticket to Ride)는 앨런 R. 문이 디자인하고 데이즈 오브 원더가 낸 기차 노선 게임입니다. 같은 색 카드를 모아 도시 사이에 철도를 깔고, 목표 카드에 적힌 도시를 연결하면 점수를 얻습니다. 출시된 해에 슈필 데스 야레스를 받았고, 이후 여러 후속작이 나오며 시리즈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는 더 깊이 있는 '게이머용 게임'도 늘어났습니다.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보드게임 평가 사이트 보드게임긱(BoardGameGeek)에서 5년 넘게 1위를 지켰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아그리콜라였습니다.

2008년의 도미니언(Dominion)은 새로운 장르를 열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작은 카드 묶음으로 시작해, 게임 도중 카드를 사서 자기 덱을 키워 가는 덱 빌딩이라는 방식입니다. 도미니언은 최초의 덱 빌딩 게임으로 꼽히며, 이후 수많은 카드 게임과 비디오 게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로게임과 아메리트래시

유로게임이 퍼지면서, 이와 대비되는 미국식 보드게임을 부르는 말도 생겼습니다. 바로 아메리트래시(Ameritrash)입니다. '미국(America)'과 '쓰레기(trash)'를 합친, 낮춰 부르는 표현입니다. 중립적으로는 '아메리게임(Amerigame)'이나 '미국식 보드게임'이라고 합니다.

두 스타일의 차이는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분유로게임아메리트래시(미국식)
중심규칙과 설계의 정교함주제와 이야기, 분위기
상호작용간접 경쟁(자원·자리 다툼)직접 충돌(공격·전투)
운적은 편주사위 등 운의 비중이 큰 편
탈락거의 없음탈락이 있는 경우가 많음
구성품나무 말, 타일, 카드정교한 피규어, 많은 카드

다만 지금은 이 구분이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유로게임에 이야기와 직접 대결 요소를 섞거나, 미국식 게임에 유로게임의 정교한 규칙을 가져온 '하이브리드' 게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협력 게임과 레거시 게임: 새로운 형식의 등장

2008년 Z-맨 게임즈에서 나온 팬데믹(Pandemic)은 보드게임의 또 다른 방향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네 가지 질병이 퍼지는 상황에서, 2~4명의 플레이어가 의사·과학자 같은 역할을 하나씩 맡아 함께 치료제를 찾는 협력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끼리 겨루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게임 자체를 상대로 이기거나 지는 구조입니다. 2009년 슈필 데스 야레스 후보에 올랐습니다.

2015년 10월에는 매트 리콕과 롭 다비오(Rob Daviau)가 함께 만든 팬데믹 레거시: 시즌 1이 나왔습니다. '레거시' 게임은 한 판이 끝날 때마다 보드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카드를 찢는 등 게임 자체가 영구적으로 바뀌는 방식입니다. 봉인된 상자와 카드가 특정 사건이 일어날 때 열리고, 여러 판에 걸쳐 1년 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보드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는 같은 게임'이 아니라 '한 번 끝까지 가는 캠페인'으로 바꾼 시도로 평가받았습니다.

2019년에 나온 윙스팬(Wingspan)은 엘리자베스 하그레이브가 디자인하고 미국 스톤마이어 게임즈가 낸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야생 보호구역에 새를 불러 모으며, 새 카드의 능력이 서로 연결되도록 '엔진'을 만들어 갑니다. 디자이너가 직접 관찰한 새 기록과 생물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카드를 만들어, 새의 실제 특성이 능력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2019년 케너슈필 데스 야레스를 받았고, 혼자 하는 솔로 모드도 지원합니다.

크라우드펀딩: 출판사 없이 게임을 만드는 길

2010년대에는 킥스타터(Kickstarter) 같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이 보드게임 시장의 큰 축이 되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먼저 플레이어에게 후원을 받아 게임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익스플로딩 키튼(Exploding Kittens): 웹툰 작가 매슈 인먼(The Oatmeal) 등이 만든 카드 게임으로, 2015년 1만 달러를 목표로 킥스타터를 시작해 8분 만에 목표를 넘겼습니다. 최종적으로 21만 9,382명에게서 약 878만 달러를 모았고, 당시 킥스타터 역사상 가장 많은 후원자를 모은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 글룸헤이븐(Gloomhaven): 아이작 차일드리스가 만든 캠페인형 협력 던전 탐험 게임입니다. 2015년 첫 펀딩에서 약 38만 달러를 모았고, 좋은 평가를 받은 뒤 2017년 두 번째 펀딩에서는 4만 명 넘는 후원자에게서 약 400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2017년 보드게임긱 1위에 올라 2023년 2월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크라우드펀딩은 작은 팀도 큰 게임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었고, 목표 금액을 넘을 때마다 구성품을 늘려 주는 '스트레치 골' 방식도 흔해졌습니다.

디지털 보드게임: 화면 속으로 들어간 테이블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보드게임을 디지털로 옮기기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2009년 아이폰에 카탄과 주로레토(Zooloretto)가 나왔고, 2010년 6월에는 카르카손이 앱스토어에 올라왔습니다. 이후 아이폰·아이패드용으로 만든 티켓 투 라이드는 실물 보드게임의 판매까지 크게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디지털판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규칙 계산과 점수 정산을 컴퓨터가 대신해 주고, 상대가 없어도 AI나 온라인 상대와 바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윙스팬은 작은 스타트업 몬스터 카우치(Monster Couch)가 디지털판을 맡아 2020년 9월 스팀으로 처음 출시했고, 이후 닌텐도 스위치·엑스박스·모바일·플레이스테이션으로 옮겨 갔습니다.

규칙을 자동화하지 않는 방식도 있습니다. 2015년 6월 출시된 테이블탑 시뮬레이터(Tabletop Simulator)는 물리 엔진 위에 탁자를 하나 놓고, 플레이어가 직접 카드와 말을 집어 옮기는 가상 공간입니다. 사용자가 직접 게임을 만들어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15만 종이 넘는 게임 정보와 사용자 평점을 모은 보드게임긱은 2000년대 이후 보드게임 팬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사이트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치며: 현대 보드게임이 바꾼 것

현대 보드게임 30년의 흐름을 정리하면, 보드게임은 '운에 맡기는 가족 오락'에서 '함께 앉아 생각을 나누는 놀이'로 바뀌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탄이 교환과 협상의 재미를 보여 주었고, 카르카손과 티켓 투 라이드가 입문의 문턱을 낮추었으며, 팬데믹과 윙스팬은 경쟁하지 않는 재미와 새로운 주제의 가능성을 넓혔습니다. 크라우드펀딩과 디지털 플랫폼은 게임을 만드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을 더 가깝게 연결했습니다.

한편 체스·바둑·장기 같은 전통 게임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현대 보드게임이 '모두가 끝까지 참여하는 설계'를 고민했다면, 전통 게임은 오랜 세월 다듬어진 단순한 규칙의 깊이를 보여 줍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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