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형 RPG란? 클리커·인크리멘털 게임에서 '키우기' 게임까지
켜 두기만 해도 캐릭터가 자라는 방치형 RPG. 프로그레스 퀘스트와 쿠키 클리커에서 시작된 인크리멘털 게임의 기원과 갈래, 대표작, 프레스티지 같은 설계 포인트를 정리합니다.
방치형 RPG는 게임을 켜 두거나 아예 꺼 두어도 캐릭터가 알아서 싸우고 성장하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가끔 들어와 쌓인 보상을 받고, 강화할 곳을 고른 뒤 다시 나갑니다. 한국 모바일 시장에서는 제목에 '키우기'가 붙은 게임들이 이 장르를 대표하는 이름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방치형 게임이 무엇인지,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떤 갈래로 나뉘는지, 대표작은 무엇인지 정리합니다. 이어서 '숫자가 커지는 재미'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설계 포인트와 이 장르가 맞는 사람도 살펴봅니다. RPG 전체의 흐름은 RPG의 역사에서, 다른 RPG 갈래와의 비교는 RPG 종류 총정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방치형 RPG의 정의와 핵심 재미
방치형 게임은 영어권에서 인크리멘털 게임(incremental game)이라는 더 넓은 이름 아래 묶입니다. 반복 행동이나 자동화로 게임 속 자원을 조금씩 쌓고, 그 자원으로 성장 속도를 높여 가는 게임입니다. 화면을 계속 누르는 쪽에 무게를 두면 클리커 게임, 손을 떼도 진행되는 자동화에 무게를 두면 아이들(idle) 게임, 즉 방치형 게임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게임이 두 요소를 함께 가집니다.
방치형 RPG는 이 구조를 RPG 형식으로 옷 입힌 것입니다. 사냥, 레벨, 장비, 동료 같은 RPG 요소가 있지만, 전투는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플레이어의 역할은 '어디에 투자할지'를 정하는 것입니다.
핵심 재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 숫자가 폭발적으로 커지는 쾌감: 처음엔 1, 10이던 피해량이 금세 수백만, 수조로 늘어납니다. 너무 커서 1T(조) 같은 약어나 과학적 표기법을 쓰기도 합니다.
- 돌아왔을 때의 보상: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진행된 결과를 한꺼번에 받습니다. "다녀왔더니 쌓여 있다"는 감각이 다시 들어오게 만듭니다.
- 실패 없는 안정감: 대부분 지는 상황이 거의 없고, 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머리를 크게 쓰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휴식이 됩니다.
기원: 풍자에서 시작된 장르
재미있게도 방치형 게임은 다른 게임을 비꼬는 풍자에서 출발했습니다. GDC 강연에서 이 장르를 분석한 앤서니 페코렐라는 2002년 에릭 프레드릭슨이 만든 『프로그레스 퀘스트(Progress Quest)』를 장르의 시작으로 꼽았습니다. 프로그레스 퀘스트는 『에버퀘스트』 같은 MMORPG의 반복 사냥을 패러디한 게임으로, 캐릭터를 만든 뒤에는 플레이어가 할 일이 전혀 없고 게임이 혼자 진행됩니다.
2010년 이언 보고스트가 페이스북에 낸 『카우 클리커(Cow Clicker)』도 소셜 게임을 풍자한 작품이었습니다. 소를 클릭하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오히려 주류 언론의 관심을 받은 첫 방치형 게임이 되었습니다. 웹 게임 사이트 콩그리게이트(Kongregate)는 초기 방치형 게임의 중심지였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초기 시각적 방치형 게임 가운데에는 한국 MMORPG 『메이플스토리』의 자동 사냥(봇)을 패러디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장르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은 2013년 프랑스 개발자 쥘리앵 '오르테유' 티에노가 만든 『쿠키 클리커(Cookie Clicker)』부터입니다. 커다란 쿠키를 누르면 쿠키가 하나씩 생기고, 모은 쿠키로 '건물'을 사면 자동으로 쿠키가 만들어지는 단순한 구조였습니다. 2014년 하이퍼 히포의 『어드벤처 캐피털리스트』는 게임을 꺼 둔 동안에도 수익이 쌓이는 오프라인 진행과, 유료 부스트 같은 수익 모델을 일찍 도입했습니다. 같은 해 플레이소러스의 『클리커 히어로즈』는 RPG식 영웅과 몬스터를 내세웠고, 진행을 초기화하는 대신 영구 보너스를 받는 '프레스티지(환생)' 구조를 모바일에서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하위 분류와 특징
| 갈래 | 특징 | 예 |
|---|---|---|
| 클리커형 | 화면을 직접 눌러 자원을 모으는 비중이 큼 | 쿠키 클리커 초기 단계 |
| 경영형 방치 | 가게·공장·건물을 사서 수익을 자동화 | 어드벤처 캐피털리스트 |
| 방치형 RPG | 자동 전투, 영웅·장비 성장, 스테이지 진행 | 클리커 히어로즈, AFK 아레나 |
| 엔딩이 있는 인크리멘털 | 일정 단계에 이르면 끝나는 구조, 퍼즐·탐험 요소 | 캔디 박스!, 유니버설 페이퍼클립스 |
| 제로 플레이어형 | 플레이어 개입이 거의 없이 진행을 지켜봄 | 프로그레스 퀘스트 |
| 하이브리드 | 다른 장르에 방치 보상과 자동 진행을 결합 | 수집형 RPG의 방치 보상, MMORPG의 자동 사냥 |
대표작
| 연도 | 게임 | 개발사 | 특징 |
|---|---|---|---|
| 2002 | 프로그레스 퀘스트 | 에릭 프레드릭슨 | MMORPG 패러디, 혼자 진행되는 RPG |
| 2010 | 카우 클리커 | 이언 보고스트 | 소셜 게임 풍자, 언론의 주목을 받은 첫 방치형 게임 |
| 2013 | 쿠키 클리커 | 오르테유(쥘리앵 티에노) | 장르 대중화, 건물과 업그레이드 구조 |
| 2014 | 어드벤처 캐피털리스트 | 하이퍼 히포 프로덕션스 | 오프라인 진행과 유료 부스트 도입 |
| 2014 | 클리커 히어로즈 | 플레이소러스 | 방치형 RPG의 원형, 프레스티지 구조 |
| 2019 | AFK 아레나 | 릴리스 게임즈 | 영웅 수집과 방치 보상을 결합한 모바일 RPG |
AFK 아레나는 2024년 후속작 『AFK 저니』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도 2020년대 들어 '○○ 키우기'라는 제목의 방치형 RPG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설계 포인트
1. 지수 성장의 곡선
방치형 게임의 뼈대는 '비용이 오르는 속도'와 '수익이 오르는 속도'의 줄다리기입니다. 상위 단계의 건물이나 장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지고, 그래서 다음 단계까지 걸리는 시간이 비슷하게 유지되거나 조금씩 길어집니다. 이 곡선이 너무 가파르면 벽에 부딪힌 느낌이, 너무 완만하면 성장의 쾌감이 사라집니다.
2. 프레스티지(환생)
진행이 느려질 즈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대신 영구 보너스를 주는 장치입니다. 다시 시작한 플레이어는 예전에 오래 걸리던 구간을 빠르게 지나가며 강해진 자신을 확인합니다. 언제 초기화할지 고르는 것 자체가 전략이 되고, 『렐름 그라인더』처럼 여러 겹의 환생 구조를 둔 게임도 있습니다.
3. 오프라인 보상과 복귀 동기
꺼 둔 시간만큼의 보상을 얼마나, 몇 시간까지 쌓아 줄지가 복귀 주기를 정합니다. 너무 짧게 막으면 피곤하고, 무제한이면 접속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4. 큰 수의 표현
수가 커질수록 화면에 어떻게 보여 줄지도 설계 문제가 됩니다. K·M·B·T 같은 약어, 알파벳 단위, 과학적 표기법 중 무엇을 쓸지 정하고, 프로그램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도록 큰 수 전용 자료형을 쓰기도 합니다.
5. 적극 플레이와 방치의 균형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게임은 금방 잊힙니다. 업적, 단계별 목표, 짧은 이벤트처럼 들어왔을 때 할 일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페코렐라는 많은 플레이어가 자동 클릭 프로그램을 쓰는 것이 부정행위라기보다 설계상의 결함을 보여 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손이 아플 만큼 클릭을 요구하는 구간이 있다면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6. 수익 모델의 절제
방치형 게임은 광고 시청 보상(오프라인 보상 2배, 짧은 부스트)과 유료 부스트, 가챠를 많이 씁니다. 무료로도 충분히 성장하는 느낌을 지켜 줘야 오래 남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추천
- 바쁜 일상 속에서 틈틈이 짧게 들어와 보상을 챙기고 싶은 사람
- 숫자가 커지고 효율을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 지거나 실패하는 스트레스 없이 가볍게 즐기고 싶은 사람
- 다른 일을 하며 화면 한쪽에 켜 두고 싶은 사람
반대로 직접 조작하는 손맛이나 긴장감 있는 승부를 원한다면 금방 심심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방치형 RPG
방치형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꾸준히 성공해 온 장르입니다. 쿠키 클리커의 개발자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을 '비게임(non-game)'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페코렐라는 이 장르를 두고 "거의 존재하고 싶어 하지 않는" 농담 같은 장르인데도 계속 성공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영향력은 오히려 다른 장르에서 더 크게 보입니다. 실시간 전략·소셜 게임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진행되게 만들었고, 일부 MMORPG는 자동 사냥으로 초반 구간을 건너뛰게 합니다. 수집형 RPG의 방치 보상, 슈팅·RPG에 들어간 짧은 환생 구조도 모두 방치형 게임에서 건너온 요소입니다. 모바일 환경이 계속되는 한, 짧게 들어와 크게 성장하는 이 구조는 다양한 장르 안에서 계속 쓰일 것으로 보입니다.